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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세이

윤정희와 이창동 감독의 <시>

by 콩장수 2023. 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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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희를 추모하며,

 

얼마 전 한국 영화계에 한 획을 그은 배우 윤정희가 세상을 떠났다. 내 부모의 세대에서는, 그녀는 한국의 오드리 헵번이라 불릴 정도로 아름다움과 지성을 겸비한 배우였다. 10년 전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가 개봉했을 때, 예술영화라는 이유로 난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후에야 이 영화를 보게 되었다. 밀양 여고생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로, 한 여학생의 죽음에서 시작한다. 그 사건에 연루된 가해자는 바로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할머니의 손자였다. 할머니는 시를 평생 한번도 써 본일이 없지만 시를 짓는 것이 작은 바람인 순수한  문학소녀였다.  

할머니는 이혼한 딸의 자식을 홀로 맡아서 뒷바라지를 하면서도, 중풍을 앓는 노인의 목욕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비를 벌었다. 알츠하이머가 진행 중이지만 혼자서만 꾹 마음속에 품어 둔 그녀의 현실은 그야말로 어둠이었지만,  길가에 핀 꽃을 바라보고 나무의 이야기를 들으려 귀 기울이는 그녀는 오히려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려고 애썼다.

손자를 지켜주려는 마음과 피해자를 애도하는 마음이 교차하며 그녀를 힘들게 했다. 손자를 구하기위해 피해자의 어머니를 찾아가기도 하고, 합의금을 마련하기 위해 애를 쓰기도 하지만, 결국 그녀는 자신의 손자를 스스로 신고하고 피해자를 향한 시를 남긴 채 사라진다. 


시 수업에서 강사는 사과를 꺼내들며 이야기한다. 사과를 본 적이 있냐고. 강사는 여기 있는 그 누구도 사과를 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아름다움을 보려면 애정을 가지고 유심히 살펴 그 본질에 좀 더 다가가야 한다.  그러다 보면 마음에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이 있으며, 시는 그것을 글로 표현한다는 것이다. 

 

할머니의 세상은 어두웠을까. 누가 보더라도 할머니는 불행한 삶 그자체였다. 하지만  타인의 날 선 시선과 삶의 고단함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세상에 향한 넘쳐나는 애정을 품은, 시를 사랑하는 할머니였기에 가능했으리라.

 

윤정희 배우의 따뜻한 연기와 감동으로 큰 울림이 주는 작품이었다. 참 좋은 영화였다. 

 

<아네스의 노래>


그곳은 어떤가요 얼마나 적막하나요
저녁이면 여전히 노을이 지고
숲으로 가는 새들의 노랫소리 들리나요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 당신이 받아볼 수 있나요
하지 못한 고백 전할 수 있나요
시간은 흐르고 장미는 시들까요

이젠 작별을 할 시간
머물고 가는 바람처럼 그림자처럼
오지 않던 약속도 끝내 비밀이었던 사랑도
서러운 내 발목에 입맞추는 풀잎 하나
나를 따라 온 작은 발자국에게도
작별을 할 시간

이제 어둠이 오면 다시 촛불이 켜질까요
나는 기도합니다
아무도 눈물을 흘리지 않기를
내가 얼마나 간절히 사랑했는지 당신이 알아주기를

여름 한낮에 그 오랜 기다림
아버지의 얼굴 같은 오래된 골목
수줍어 돌아앉은 외로운 들국화 까지도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당신의 작은 노랫소리에 얼마나 가슴 뛰었는지

나는 당신을 축복합니다
검은 강물을 건너기 전에 내 영혼의 마지막 숨을 다해
나는 꿈꾸기 시작합니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다시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맡에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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