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움받을 용기 / 기시미 이치로, 고가 후미타케'를 읽고
몇 년 전 서점가에서 크게 인기를 끌었던 책이었던 만큼, 독자들의 의견도 크게 나눠졌다. 인문서를 가장한 자기계발서다, 아들러의 사상을 제대로 녹이지 못했다는 비판과 함께 자신이 처한 문제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식에 통찰력이 생겼다는 찬사도 있었다. 그나저나‘아들러’란 이름이 왠지 친숙했다. 예전에 책에서 요약된 몇 줄을 훑고 지나갔던 적은 있었던 것 같은데 머릿속에 남아있는 것은 없다. 밝혀두자면 나는 심리학의 문외한이다.
다시 본론으로 책 이야기를 하자면 이렇다. 이 책은 청년과 철학자의 대화로 구성이 되어있는데, 청년은 철학자의 이 황당한 이야기를 마뜩잖아한다. 청년은 받아들이기 힘든 철학자의 주장에 끊임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철학자의 답변에 반박을 이어나간다. 철학자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정신의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알프레드 아들러(Alfred Adler)의 개인심리학을 설파하고 지지하는 인물이다. 청년과 철학자는 프로이트와 아들러, 그리고 원인론과 목적론의 대립처럼 보였다.
그들의 대화를 엿들으면서, 나도 불편한 감정이 일었다. 트라우마가 없다니. 감정이 내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며,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으로 삼은 거라고 했다. ‘저는 불행합니다’라고 말하면, ‘그건 자네가 불행을 선택해서 그렇다네’라고 답하는 철학자의 말이 왠지 밉상이다.
우습게도 나는 프로이트 심리학을 처음 접했을 때도 거부감이 느껴졌었다. 아마도 나는 청개구리 본능이 있나 보다. 예컨대, 오래전 대학에서 교양수업으로 심리학 개론을 수강했을 때다. 프로이트의 사상을 배울 때도 불편함이 느껴졌다. 내가 인지하지 못한 과거의 상처는 잠재의식이라는 비밀스러운 방에 차곡차곡 저장이 되어, 알게 모르게 내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고 했다. 트라우마가 있으면 그 원인을 찾아 직접 치료하지 않는 한 사라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냥 살다 보면 잊힐 텐데, 굳이 이 고통스러운 기억을 다시 끄집어내야 한다는 것이 납득하기 힘들었다. 이놈의 상처는 마치 동물의 몸속에 몰래 들어가 기생하는 연가시와 같은 참 성가신 녀석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사람은 참 약한 존재구나. 무기력하게 느꼈다.
각설하고 다시 책으로 돌아가면, 아들러를 따르는 철학자는 이렇게 말한다. 트라우마 따위는 없으며 인간의 생각이나 행동은 과거의 원인에 대한 결과가 아니라, 자신이 선택한 목적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프로이트의 생각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이것은 대학 시절에 배운 인과론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인간이 감정의 지배를 받는 수동적인 역할에서 벗어나 그것을 통제하고 변화할 수 있는 존재라는 관점에서는 반길 만한 내용이었다.
내 마음은 왔다 갔다 했다. 아들러의 철학은 그럴듯하기도 했고, 억지스럽기도 들리기도 했다. 예컨대 나에게 문제가 있다면 아들러는 그 문제의 원인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문제가 있는 것은 바로 내가 그것을 목적대로 선택했을 것이란 거다. 예컨대, 과거에 경험한 상처로 집안에 하루 종일 홀로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것은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해서 세상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홀로 있는 것이 자신에게 유익이 되므로 목적대로 선택했을 뿐이란 것이다. 어차피 밖에 나가봤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특별한 사람이 되지 못하고, 관심 밖의 존재이니 안전한 집안에 머무르며 늘 자신을 애정 어린 눈빛으로 걱정해주시는 부모님의 관심을 받기를 원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만약 이 사람이 자신의 트라우마를 내세워 ‘니가 뭘 안다고 그래’라고 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불행을 무기로 삼아 그 특별함을 내세워 권위를 취하려는 일종의 우월 심리라고 했다. 우월 콤플렉스와 열등 콤플렉스의 뿌리는 같다는 것이다.
다시 혼란스러웠다. 어찌 보면 인간을 자신의 감정과 행동을 통제할 수 있는 주체적인 모습으로 보이긴 하지만, 달리 보면 어떤 문제를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조차도 개인에게 모두 전가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반감이 들었다. 가만, 내가 이렇게 혼자서 혼란스러울 필요가 있나? 어차피 사람의 생각이란 것은 다른 것이고, 어느 한쪽에 치우치며 맹신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인상 깊었던 내용을 요약해 보았다. (아래 박스)
사람들은 누구나 열등감에 시달린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도, 절세미녀도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 열등감의 이유는 바로 우월성 추구에 있고, 이것은 무기력한 상태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우린 잘못된 인과관계에 빠진다. 만약 학력이 낮아서 성공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학력이 낮기 때문이 아니라 성공하려고 현실적인 노력을 하고 싶지 않아서 그렇다.
자신의 불행을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불행을 특별함으로 내세워 뽐내려고 하는 것이다(불행자랑). 그렇게 불행을 드러내면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대해주니 그 특별함을 유지하려고 불행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대등하고, 우열, 선악으로 규정지을 수 없다. 세로축이 존재하지 않고 평평한 공간이다.
경쟁이라는 긴장감 속에서 살아가는 데, 경쟁하는 상대는 친구가 될 수 없다. 경쟁의 끝에는 승자와 패자만 남을 뿐이다. 이런 경쟁에 길들여져 있는 사람은 주변과 세계를 적으로 여긴다. 그리고 이들은 경쟁에서 늘 이겨야 하므로 행복할 수 없다.
우리는 타인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타인의 평가는 타인의 인생을 살게 만든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기를 원하는 것은 바로 남에게 어떻게 보이느냐에 집착하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이런 사람들은 자기중심적이고 자신에 대한 집착이 강한 사람이다.
남이 나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든 마음에 두지 않고, 남이 나를 싫어해도 두려워하지 마라. 미움받는 것은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나를 싫어하는 것은 타인의 과제이고, 내가 개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타인을 조종할 수도 없고 조정해서도 안되니, 과제를 분리시키면 될 일이다. 결국 인간관계의 카드는 내가 쥐고 있다.
칭찬을 하지 마라. 칭찬은 타인으로부터 좋다는 평가를 받는 것인데, 결국 상벌의 수직적인 구조로 내모는 것이다. 결국 칭찬을 하는 것은 타인을 조종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열등감은 수직적 관계 속에서 발생한다. 창찬을 받는 사람은 오히려 자신이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잘했어'라는 말 대신 ' 고맙다'라는 표현을 사용해라.
행복이란 공헌감이다. 인정 욕구는 자신이 가치 있음을 느끼고 싶어 하는 공헌감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단지 타인에게 도움이 된다고 느낄 때 자신의 가치를 느낀다. 타자 공헌이란 나를 버리고 누군가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의 가치를 실감하기 위한 행위이다.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나온다. 최대의 불행은 자기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공동체에 유익하다',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통해서 자신의 가치 있음을 실감한다.
평범해질 용기를 가져라. 평범한 것은 무능한 것이 아니라 일부러 자신의 우월성을 과시할 필요가 없는 것일 뿐이다.
철학자와 청년의 대화는 균형이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청년이 철학자에게 상담을 받기 위해 찾아온 것이기에 철학자가 주도하는 부분은 있지만, 철학자의 신념은 너무나 확고해서 청년의 말에 '아닐세'라고 말하는 부분은 철학자가 그토록 말했던 대등한 관계라고는 볼 수 없다. 한 번은 철학자가 권력투쟁을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만으로 권력투쟁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한 적이 있는데, 이는 이 사람이 틀렸으므로 나는 반드시 그를 이겨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고 확고하게 주장하던 철학자의 말이 모순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현실을 너무 반영하지 못하는 이상론을 펼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게 인식하면서 인정받기 위해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삶에는 큰 울림을 주었다. 끊임없는 경쟁 속에서 지쳐있는 사람들에겐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고, 특별함을 추구하지 말라고, 당신의 존재 자체로도 공헌을 하고 있다고 말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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